백당나무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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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나무
히히, 혼자 웃습니다. 왜냐고요?
백당나무 잘 익은 열매를 찍기 위해 알아 둔 한 그루를 찾아다닌 지 삼 년, 그 분 뵌 것만 수백 번도 더 될 것입니다. 새잎이 돋을 무렵부터 올해는 꼭 찍고 말리라 다짐하고, 기대하고, 기도했습니다. 꽃이 피면 개화의 상황을 보며 올해는 열매가 탐스럽게 열릴 것 같다고 나만의 기대 반, 추측 반의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한두 송이 핀 해는 저것만이라도 제발 실하게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제 기대와 기도는 부풀었다 금세 사라지는 물거품이 되곤 했습니다. 어떤 해에는 아예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은 해에는 낙과(落果)한 것인지, 누군가의 손이 탄 것인지 꽃자루만 덩그러니, 을씨년스럽게 날 맞이하곤 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슴 한 구석이 비는 허망함을 맛보며 내년 촬영 일지 9월과 10월 난에 ‘백당나무 열매’라 기입하는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10월 8일, 시험감독이 끝나고 오후에 관음사에서 고둔치로 오르는 계곡으로 처음 탐사를 나갔습니다. 원래 올 일 년 동안 파고들 곳은 보문사 쪽이었으나 이번 주 시간이 많이 난 관계로 다른 곳에 욕심을 낸 것이죠. 산행하는 사람들은 계곡 험한 바위들을 타넘는 저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허나 어디 한두 번 당하는 일입니까? 무시하고 어느 녀석이 제 눈길을 피하려고 하는지에만 신경을 썼죠. 계곡 초입부터 본격적인 산행에 접어드는 곳까지에는 산형과의 한 종인 ‘궁궁이’가 지천으로 깔려있었습니다. 미친 짓 하고 돌아다닌 지 삼 년 동안 겨우 한 녀석 면식했고, 촬영해 둔 사진을 애지중지 보관했었는데 눈길 돌리는 데마다 새롭게 돋아난 어린 것에서부터 꽃대를 올리고 막 피어나는 녀석에다, 그만 열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꽃잎들을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 마른 암술의 흔적을 달고 막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녀석, 다 익어 말라가는 열매를 달고 있는 녀석, 후세를 위해 꽃대를 무너뜨리고 열매를 땅 가까이 근접시켜 알갱이를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 그야말로 궁궁이의 일생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황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녀석 눈에 찍어두고 봄부터 초겨울까지 수십 차례 알현했던 것을 생각하니 그 일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었던가를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맥없이 바위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햇살과 노을을 머금으며 자라 속이 비칠 듯 말갛고 바알간 백당나무 열매 송아리들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쁨도 잠시 또 다시 맛보는 허망함,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사는 것이 그런가 보죠? 노심초사(勞心焦思), 애를 태우는 노고가 쓸데없는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마음 쓰지 않았는데 우연한 순간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삶인가요? 그렇다면 구태여 고심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한동안 물끄러미 허공에 눈을 박고 생각해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연한 행운은 결코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그 행운은 수없이 맛본 허망함이 가져다 준 결과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된 몸뚱이 굴리고 시린 마음 맛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음도 잠시, 다시 그 애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순간 말간 알알들이 핏빛으로 터지며 안쓰러운 외침이 있었습니다.
“요놈아, 마음이 어두워 눈이 먼 요놈아, 드넓은 세상 한 귀퉁이의 땅뙈기 한 조각밖에 볼 줄 모르는 요놈아, 네 숨구멍 위 지척의 세상도 볼 줄 모르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놈아.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는 주제에 살아있다고 몸뚱이 놀리고 다니느냐?”
천둥처럼 귓구멍을 먹먹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리 집착하는 것일까요? 귀와 눈을 닫고 마음을 걸어 잠근 채 한 곳으로만 달려가고자 하는 것인가요? 눈꺼풀도 볼 줄 모르는 동물이면서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볼 줄 아는 양하는 것인가요? 제가 보는 것이 그만 세상 중심에 서 있는 것이고, 제가 하는 일이 그만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부와 권력과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세상에 눈 먼 것일까요?
우러러보니 누군가 얘기했듯 튕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이내 맑고 푸른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가을 하늘을 배경 삼아 순백의 뭉게구름이 포근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맑은 해님은 제 빛을 세상 구석구석 모든 물상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삼라만상은 그 빛을 마음껏 향유하며 기쁨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산행하는 인간들만 눈이 먼 채, 귀가 먼 채 오직 정상만 바라보며 헐떡거리고 있었습니다.
댓글목록
Young Flower님의 댓글
집착하지 말라고 사진도 보이지 않게 하셨나 봅니다. ㅎㅎㅎ
오늘도 헐떡이는 마음을
이 글을 읽으면서 좀 쉬어 갑니다. ^^*)
설용화님의 댓글
상당히 고생하시며 쓰신 글이...^^
아잉님의 댓글
세상은 넓고 그 안에 삶의 송용돌이속에서 부딪치고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많은데 어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 같을 수 있겠는지요
그저 물 흐른대로 바라보는 세상...쉽지만 쉽지 않은 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가는길외에 수많은 길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에게도 존재의 의미는 소중한거겠지요
통통배님의 댓글
야사모의 누가 그랬습니다.
꼭 보고싶은 것이 있으면 조만간 보게된다.
원하는 마음 그것이 원하는 곳을 안내해 준다는 뜻입니다.
저도 이 말에 100% 공감합니다.
우연찮게 본것이 아니라~~
보시고 싶어서 보신거랍니다.
물론 집착하는 것은 않좋지만
꽃에 관한한은~~
집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볼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꽃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지요.
ㅋㅋ
이렇게 써 놓으니까 제가 무신 철학자 같군요. 주제넘었습니다.
좋은 글을 보니 뭐라고 떠들고 싶어졌습니다.
가야금님의 댓글
내가 제가 보고고싶은 꽃이 있어서 마음 속으로 꼭 만나고 싶다고 늘 생각하면 곧 만나게 되더라고 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올 해 깽깽이플도 만났고, 들바람꽃, 변산바람꽃을 처음으로 만나 2008년을 너무 행복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힘든 일도 조금 서러운 일도 그저 흘려버릴 수 있게 되더라구요. 저는 꽃과 사랑에 빠진 거라고 남들이 놀려도 그저 좋답니다.
찔레꽃님의 댓글
찔레꽃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야인님은 분명 봄철에 백당나무 꽃을 좋아하시분 이시군요
꽃은 산수국 처럼 피지만 그 순백의 하얀색은 너무 아릅답게 피어나지요
저도 백당나무 마니아 입니다
집 여기저기에 한 5그루 정도 심어져 있습니다
해서 집주위 어디를 가도 볼수 있게끔 말입니다

